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마리 비안네 (문단 편집) == [[사제(성직자)|사제]]가 되기까지 ==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다르디이의 농부 마티외 비안네와 마리 블루즈 사이에서 6남매 중 넷째로 출생했다. 비안네가 어렸을 때는 [[프랑스 혁명]] 때문에 [[사제(성직자)|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성당과 [[수도원]]에서 쫓겨나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가들의 눈을 피해 사목활동을 하는 사제들의 모습에서 [[영웅]]을 보았다고 한다. 비안네 가족은 먼 곳까지 가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했고, 비안네 본인도 정식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지만 무사히 첫 [[고해성사]]와 첫 [[영성체]]까지 했다. 이 때 나이는 13살. [[미사]]를 드리는 내내 행여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창문을 건초더미로 막았다고 한다. 종교탄압이 끝나고 교회가 안정을 되찾은 1802년, 그는 사제 성소를 지니고 그에 대한 교육을 받고 싶어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를 위해 다르디이를 떠날 것을 허락했다. 비안네는 20세 때 인근 에퀼리 마을로 떠나 발레 신부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애당초 혁명 때문에 기초 교육이 부실해서 성적은 좋지 못했다. 특히 [[라틴어]]를 그렇게 어려워했다고. 하루는 마티아라는 학생이 8살이나 연상인 열등생 비안네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런데 비안네가 얼마나 못 알아먹었으면… 마티아는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비안네에게 '''"이 멍청아!"'''라고 막말을 하며 [[싸닥션]]까지 날렸다. 그런데 너무 착한 비안네는 몸이 튼튼해서 마티아를 주어팰 수도 있었는데도 그냥 '''"내가 모자라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었다. 이후로 마티아와 비안네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비안네 본인도 자기가 얼마나 머리가 나쁜지 알아서 발레 신부에게 "저 그냥 집에 갈게요"라고 말하곤 했지만, 발레 신부는 그가 얼마나 신앙심이 깊은지 알았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중간에 교육을 받다 말고 1809년에는 [[나폴레옹]] 군대에 징집까지 당했다. 원래 신학생으로 등록되어 있다면 면제될 일이었지만 나폴레옹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위해 병사가 더 필요했고, 몇몇 교구들이 면제를 철회해 버렸기 때문이다. 별 수 없이 그렇게 리옹으로 간 비안네는 이틀 후에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했고, 그 동안 [[프랑스군]]은 그를 내버려두고 먼저 전쟁터로 가 버렸다(…). 병원에서 퇴원한 비안네는 다시 징집되어 로안으로 가던 중 '''기도하기 위해 성당으로 갔다가 부대 행렬에서 낙오되었다'''(…). 비안네는 부대로 돌아오도록 파견된 한 젊은이를 만났지만, 도리어 그를 르포레즈(Le Forez) 산 깊숙한 곳의 탈영병이 모인 레노(Les Noës) 마을[* 현재의 프랑스 남동부 오베르뉴 론 알프스(Auvergne-Rhône-Alpe)주 루아스 현에 있는 작은 농촌 마을으로 지금도 210명도 안되는 지역이다.]로 끌고 갔다. 비안네는 과부 클로딘 파요의 농가에 신세를 지고 14개월을 외양간에서 숨어 지내며, 이름도 '제롬 뱅상(Jerome Vincent)'으로 바꾸고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겨울에는 어찌어찌 헌병의 눈을 피해 살 수 있었지만 날씨가 풀리면 어김없이 탈영병을 수색하러 오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 발효된 건초더미 속에 몸을 숨기곤 했다. 1810년 3월 모든 탈영병을 사면한다는 나폴레옹 황제의 칙령이 떨어지자 비안네는 다시 에퀼리로 돌아가, 1811년에는 삭발례[* 머리카락 일부를 잘라내는 것. 요즘에는 하지 않는다. 1972년에 교황 바오로 6세의 명령으로 폐지했기 때문이다. 김수환 추기경도 삭발례를 할 때 매우 기뻤다고 한다.]를 치르고 1812년에는 베리에르 소신학교[* 중ㆍ고등학교 과정. [[한국 가톨릭]]에도 옛날에는 소신학교(성신중ㆍ고등학교)가 있었다. 연세 지긋하신 [[신부님]]들을 보면, 중ㆍ고등학교까지도 소신학교를 졸업하신 분들이 많다. 그러나 성신중에 의해 성신고도 1982년 폐교되었고, 대신 예비 신학생 모임이 생겼다. 가톨릭 신학대학(대신학교)에 입학하여 신부가 되려는 사람은, 예비 신학생 모임에 최소 1년은 출석해야 한다. 각 [[교구]]마다 성소국이 있고, 중등부ㆍ고등부ㆍ일반부로 나뉘어져 있어, 사제직을 지망하는 남학생들과 남자 청년들을 관리한다. 2010년 가톨릭계 남학교인 [[서울]] [[동성고등학교]]에서는 예비 신학생 학급을 만들어 [[기숙사]] 생활을 시키고 기초 신학과 어학을 가르치는 등, 부분적으로 소신학교를 부활시켰다.]에, 1813년에는 리옹 대신학교[* 대학ㆍ대학원 과정. [[사제(성직자)|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신학교를 졸업해야 한다. [[한국 가톨릭]]에는 6개의 대신학교가 있다.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수원가톨릭대학교]], [[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대전가톨릭대학교]],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광주가톨릭대학교]]인데, 과정은 거의 대동소이하므로 자세한 것은 [[성신교정]] 항목 참조.]에 입학했다. 그러나 모든 수업이 [[라틴어]]로 이루어지는 대신학교에서 역시나 학업 성취도가 딸리던 비안네는, 동기들에게 비웃음까지 당하며 퇴학당했다. 보다 못한 발레 신부는 개인 교습을 하면서까지 다시 대신학교 시험을 보게 했지만, 여전히 문턱이 높았다. 마지막으로 발레 신부는 그의 경건함이 약간 딸린 머리를 보충할 수 있지 않느냐고 [[교구]]에 청원했고, 비안네에겐 감독관이 파견되어 사제로서의 자질이 있는지에 대한 평가가 치러졌다. 시험지는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고, 일단 감독관들에겐 합격점을 받았다. 하지만 [[주교]]는 별로 탐탁지 않아했는데, 그 순간 그 [[교구]]장 주교가 [[경질|갈렸다]].[* 경질 사유는 공식적으로는 [[부정부패]]라고 야사에서는 저 위에 언급된 나폴레옹을 위해서 신학생의 군 면제를 철회하고 뇌물받고 아첨하는 등으로 전 유럽의 가톨릭 분노 샀기때문이라고 한다.] 새로 부임한 [[주교]] 클로드 시몬(Claude Simon, 1744 ~ 1825)는 다행히도 비안네의 신심을 높게 평가해 주었고, 1815년 6월에는 [[부제(성직자)|부제]]로, '''[[8월 12일]]에는 드디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의 첫 [[미사]]는 [[성품성사|사제 서품식]] 다음 날 치러졌고, 발레 신부의 보좌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집전한 고해자 역시 발레 신부였다. 본래 사제가 된 후에도 고해성사 집전 자격이 유보되어 있었던 비안네 신부는, 스승 발레 신부의 피나는 노력 덕분에 사제가 될 수 있었다. 워낙 힘겹게 사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훌륭한 성직자가 되는 방법은 훌륭한 신학생으로 사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현재 가톨릭 신학생들의 좌우명처럼 여겨지고 있다.[* 2005년에 [[한국방송공사|KBS]]에서 제작한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신학생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원과 하루 - 150년 만의 공개, 가톨릭 신학교>에서도 당시 2학년생이었던 김익호 욥 신부(2014년 사제서품, [[천주교 의정부교구]])의 책상에 붙은 표어로 등장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